Parisieene Walkway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히틀러는 파리 함락 직전 이렇게 물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이 파리에서 물러날 때가 되자 히틀러는 파리를 송두리째 불태워라고 명령했다. 유럽 역사 속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던 도시를 파괴하라는 말은, 옛날에도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렸었나 보다. 당시 파리에 주둔해 있던 독일 장교는 이 명령을 거부했고, 파리는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도시로 남아있다.
침략자를 감화시킬 정도의 미학을 가진 도시라면, 아마 여행자에게는 치명적인 감상을 남겨주지 않을까.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국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걸어 다녀도 좋을 만큼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로 이 도시가 여행자를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망상마저 든다. 지하철을 찾아 땅밑으로 들어가는 대신,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감상해보자. 파리가 여행자들을 위해 무엇을 남겨놓았는지.
센강은 파리를 동과 서로 나눈다.
어떤 파리 애호가는 이 구절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한때 베스트셀러 제목의 일부이기도 했던 이 구절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센 강을 기준으로 파리의 볼것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에, 설사 자신이 길치더라도 항상 센 강을 향해 걸으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유럽의 강변은 보증수표와 같다. 실망하는 법이 없다.
센강(La Seine) 따라 걷기
* 이동경로 : 노트르담 - 루브르박물관 - 오르세미술관 - 로뎅미술관 - 앵발리드
* 핫플레이스 : 노트르담의 뒷면, 센강변의 노점상, 튈르리정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오늘날에는 20개 구(Arrondisement)로 이루어진 파리지만, 예전에는 센강의 시테(Cite)섬이 파리의 전부였다. 때문에 오늘날의 파리 구역도 이를 중심으로 달팽이 모양을 그리며 구획이 나뉘어 있다. 눈치 빠른 여행자들이라면 1구가 가장 오래된 파리라는 점을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시테섬 주변을 돌아보면 곳곳에 파리가 자랑하는 유적지가 눈에 띈다.
< 노트르담 드 파리 Notre Dame De Paris > 에서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지켜내던 성당이 바로 이곳이다. 오늘날에는 하얀 외벽의 주택가와 함께 파리 일상에 자리하고 있지만, 옛날의 고고함을 잃지 않았다. 두 개의 첨탑이 확 눈에 띄는 전면부가 유명하지만, 뒤편의 부조 역시 놓치기 아까운 포인트다.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수고가 아깝지 않을 풍경이다.
시테섬 근처 거리의 다양한 기념품 좌판도 천천히 걸으면서 볼만한 것들이다. 센강을 배경으로 두고 다채로운 파리의 이미지가 늘어서 있다. 호객행위에 지친 이들이라면 어떤 손님이 와도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는 판매상에게서 신선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걷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로 유명세를 치르게 된 곳이지만 그 이전부터 프랑스 예술과 문화를 은근히 대표하던 공간이었다. 아름다운 시대 (La belle epoque)의 문학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시대를 뛰어넘어 남아있는 고서적을 손에 쥐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
센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걸어 올라간다. 얼마 안가 멋들어진 지붕의 귀족 저택 같은 건물이 보인다면 루브르 박물관에 가까워진 것이다. 조금만 더 걸으면 루브르의 피라미드도 언뜻언뜻 눈에 들어온다. 모나리자로 유명한 곳이지만, 사실 루브르는 외관 그 자체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꽉 들어찬 박물관 내부보다 피라미드 근처의 분수대에 앉아 찬찬히 근대의 호사스러운 궁전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피라미드를 뒤로하고 루브르의 뒤편으로 나와 걷던 방향으로 나아가면, 금세 '왕비의 산책길' 이었던 튈르리 정원에 다다른다. 과거의 궁전은 미술관이나 시청으로, 왕비의 산책길은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바꾸는 프랑스 문화의 '똘레랑스'를 느낄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파괴적인 혁명을 거쳤지만, 아름다운 것은 남겨놓고 함께 즐기겠다는 여유가 파리 곳곳에서 묻어나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과 로뎅 미술관, 앵발리드는 센 강 남쪽에 있다. 힘이 남아 있다면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 알렉산드르 3세 다리를 통해 건너가기를 추천한다. 드라마 <파리의 연인> 여주인공의 첫 등장을 기억하는 여행자에게는 왠지 꼭 들러야 할 기분이 드는 다리이기도 하다. 위엄 있는 기마상과 금빛 조각으로 장식된 다리는 퐁네프 다리보다 파리의 아름다움을 보다 직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강을 건너 루브르 맞은편까지 오면 바로 오르세 미술관이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술관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다. 생각보다 조그맣고 관광객 틈에 벽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모나리자>에 실망한 이들이라면, 반드시 오르세미술관을 방문해 보아야 한다. <이삭줍기>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과, 사실주의 사조의 이해가 쉬운 그림을 많이 전시하고 있다. 철도역과 호텔이 반씩 섞인 건물 자체도 둘러보기에 좋다. 일반적인 갤러리와 달리, 승강장 같은 분위기가 이색적인 곳이다.
강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남쪽으로 쭉 걸어 내려오면 다시 로뎅 미술관이 보인다. <생각하는 사람> 하나 만으로, 이곳은 둘러볼 가치가 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좋아하는 여행자에게는 필수코스로, 정원 곳곳에서 숨 쉬고 있는 조각 사이를 걷는 경험을 해볼 것.
마지막 앵발리드는 프랑스보다 외국에서 더 사랑받는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의 유해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사실 그보다는 앵발리드의 커다란 황금 돔이 더욱 눈에 띈다. 에펠탑까지 걸어가지 못한 이들은 대신 이 돔의 꼭대기에서 파리 전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강변을 따라 걷고 있으면 산책이나 조깅을 하는 파리지앵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도 일상이 되면 그 감상이 퇴색하나 보다. 하지만 여행자에게는 이처럼 무심한 파리지앵까지도 파리의 일부로 다가와 특유의 '파리느낌'을 만들어낸다. 관광지로서의 파리가 아니라 일상의 파리를 경험하는 기회는, 오로지 파리를 걷는 이들에게만 다가온다.
파리의 역사에서 일상으로
* 이동경로 : 퐁피두 - 파리시청 - 퐁네프 - 소르본 - 생 제르망 데 프레
* 핫플레이스 : 뤽상부르 정원, 파리성당(Eglise)들, 카페 플로르, 레 되 마고
하얀색 덧창, 검은색 얇은 창살의 발코니, 그 위의 작은 화단, 대리석 빛깔의 건물 등 전체적으로 근대 풍의 모습을 보여주는 파리에서 퐁피두의 외관은 단연 눈에 띄는 것이다. 파이프와 철골이 그대로 드러난 건물은 여태까지 보아왔던 중세 - 르네상스의 예술과 현대미술 사이의 괴리감을 한눈에 나타내는 것만 같다. 여행객이 느끼는 요상함은 당연한 것이다. 안의 전시 역시 흔히 생각하는 '아름다운 예술'과는 다른 것들이 많다. 하지만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형태의 미술 등 현대 미술의 다양한 시도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술관이 지루한 사람이라면 퐁피두의 가벼운 그림에서 재미를 느껴보자.
퐁피두에서 걸음을 뗀다. 센 강을 향해 걸으면 된다. 조금 지나면 파리 시민들이 바삐 지나치는 파리 시청에 도착한다. 겨울에 파리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시청 앞 광장의 스케이트장을 볼 수도 있다. 여행자를 위한 도시답게 시청 역시 단순히 공공기관의 역할만을 수행하는데 그치지 않고, 관광을 위한 무료 개방을 실시하고 있다. 내부의 인테리어와 샤반의 작품들이 여느 미술관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뽐낸다.
다시 강을 건너야 한다. 센강의 상징이라고 해도 좋을 퐁네프를 건너려면 시청에서 다시 노트르담 위쪽으로 걸어 올라가야 한다. 노틀담을 지나 센강 가운데 중세와 근대 중간쯤 시기의 성 같은 건물이 보인다면, 그 섬 위쪽 끝의 다리를 건너면 된다. 성은 콩시에르주르라는 건물로, 과거 교도소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혁명 당시 비극의 왕비인 앙투아네트가 갇혀있던 곳이기도 하다.
교도소와 연결되는 다리를 센강의 상징처럼 여기는 것이 조금 어색할 수는 있지만, 아무렴 어떠랴. 교도소까지도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파리가 가지는 매력인지도 모른다. 퐁네프 역시 알레상드르 3세 다리보다는 화려함이나 웅장함은 떨어지지만, 회색 하나로 갖가지 부조를 통해 저만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자아내고 있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영화로 유명하듯이, 퐁네프를 진정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다리 그 자체라기보다 그 위와 아래에 모여들어 사랑을 속삭이는 이들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 아래로 걸어가면 생 미쉘 광장이 있다. 여행자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곳이다. 파리에는 유명하지 않지만, 들러볼 만한 가치가 있는 광장과 정원, 극장과 미술관이 많이 숨어있다. 근현대의 파리의 모습을 그린 풍경화나 사진에서 많이 보았을, 사선구도의 건물이 골목을 나누고 있다. 생 미쉘 광장에서 그대로 생 미쉘 가 (Rue De Saint-Michielle)를 따라 걸으면 옛날 세계 최고의 명문 중 하나였던 소르본 대학에 다다른다.
거대한 외벽으로 빈틈없이 둘러싸인 대학 건물은 학교라기보다는 유럽의 고성을 방불케 하는 외관을 지니고 있다. 안타깝게도 재학생이 아니라면 학교 내부로의 출입은 통제되어 있지만, 대학 주변답게 근처는 카페와 상점, 대학생으로 가득하다. 비싼 물가의 파리 식당 대신 주변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끼니를 채울 수도 있다.
대학생의 거리를 벗어나 생 제르망 데 프레 (Saint German des Pres)로 향한다. 체력에 조금 자신이 있다면 소르본 근처의 뤽상부르 공원에 들러도 좋다. 다리를 쉬어갈 벤치야 공원 여기저기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까. 날씨가 좋다면 벤치에 앉아 독서를 즐기거나 분수를 멍하니 바라보는 여유로운 파리지앵도 만날 수 있다. 남의 눈에 신경 쓰지 않고 공원에 나와 책을 읽는데서 파리가 가진 문화예술에 대한 관대함을 엿볼지도 모르겠다.
뤽상부르 공원에서 다시 센강 방향으로 위로 올라가자, 지하철 두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걸어야 한다. 하지만 도보 여행자에게 관대한 파리는 군데군데 여행자의 쉴 곳을 준비해 놓았다. 두 블록 당 하나 꼴로 위치해 있는 성당은 대부분 무료로 출입이 가능할 뿐 아니라, 제각기 고풍스러운 멋을 간직한 공간이다. 추천 여행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도보로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작은 발견의 기쁨일 수도 있다.
생 제르망 데 프레에 도착하면 설사 다리가 아프지 않더라도, 꼭 카페 한 군데에 앉아 파리의 거리를 감상해 보자. 파리 안에서도 카페 거리로 유명한 이곳은, 옛날 위대한 문인과 화가도 즐겨 찾던 거리였다.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와 레 되 마고(Les deux Magots) 두 곳을 찾으면, 자신이 좋아하는 예술인과 자리를 공유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여행 Tip
* 카페는 잠시 몸을 쉬는 곳뿐 아니라 화장실을 이용하고 인터넷을 쓸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공중 화장실이 유료인 파리에서 아까운 지출을 피하려면 카페를 이용하는 곳이 좋다. 카페 와이파이의 경우 한국처럼 그대로 연결할 수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카페에 따로 물어보고 인터넷 연결 번호가 적힌 카드를 받아야 한다. 1인당 1개의 번호가 나오는 식이니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은 꼭 따로 카드를 받을 것.
* 파리는 분명 여행자에게 친절한 곳이지만 모든 곳이 안전한 곳은 아니다. 파리 1~9구는 관광 중심지이자 상업 중심구역으로 비교적 늦게까지 걸어도 괜찮은 구역이다. 하지만 몽마르트와 물랑루즈, 벨빌 차이나타운 등이 위치한 18~20구의 경우 여행자를 노리는 이들이 많으니 도보여행에서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센강 역시 마찬가지로 강변의 하상도로의 경우 많은 파리 시민이 돌아다니는 곳이라 방해 없이 산책을 즐길 수 있지만, 강변 위쪽의 다리 근처에는 관광객을 노리는 집시가 자주 출몰한다. 어디를 다니든 '파리 시민이 많은 곳'을 찾아다닐 것.